Life/Writing

스티브 잡스: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아즈샤 2011. 8. 25.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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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is is the text of the Commencement address by Steve Jobs, CEO of Apple Computer and of Pixar Animation Studios, delivered on June 12, 2005.
 

 이 글은 애플컴퓨터와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대표이사인 스티브잡스가 2005년 6월 12일 졸업생축사 때 발표한 것입니다.

 

 I am honored to be with you today at your commencement from one of the finest universities in the world. I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Truth be told, this is the closest I've ever gotten to a college graduation. Today I want to tell you three stories from my life. That's it. No big deal. Just three stories.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대학중의 하나인 이곳에서 여러분들의 졸업식에 함께 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진실을 말하자면, 이번이 대학교 졸업식에 가장 가까이 온 경우입니다. 저는 오늘 제 삶에 대한 세 가지 이야기를 여러분들께 들려주고 싶습니다. 바로 그거에요, 대단한 건 아닙니다. 단지 세 가지 이야기입니다.

 

†First Story
 

 The first story is about connecting the dots.
 

 첫 번째 이야기는 점들을 이어나가는 이야기 입니다.

 

 I dropped out of Reed College after the first 6 months, but then stayed around as a drop-in for another 18 months or so before I really quit. So why did I drop out?
 

 저는 리드대학 입학 6개월 후 자퇴했습니다만 자퇴하고도 18개월간은 계속 학교에 남아 있다가 결국 완전히 자퇴하고 말았습니다. 그럼 제가 왜 자퇴했을까요?

 

 It started before I was born. My biological mother was a young, unwed college graduate student, and she decided to put me up for adoption. She felt very strongly that I should be adopted by college graduates, so everything was all set for me to be adopted at birth by a lawyer and his wife. Except that when I popped out they decided at the last minute that they really wanted a girl. So my parents, who were on a waiting list, got a call in the middle of the night asking: "We have an unexpected baby boy; do you want him?" They said: "Of course." My biological mother later found out that my mo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and that my fa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high school. She refused to sign the final adoption papers. She only relented a few months later when my parents promised that I would someday go to college.
 

 그건 이미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제 생모는 젊고 미혼이었던 대학원생이었고, 그래서 그녀는 저를 입양시키기로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제가 대학교를 졸업한 부부에게 입양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저는 태어나자마자 곧 어느 변호사 부부에게 입양될 수 있도록 모든 절차가 완료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태어났을 때 그들은 마지막 순간에 정말로 여자아이를 원한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 당시 대기자 명부에 있었던 저의 양부모는 한밤중에 다음과 같은 전화를 받았습니다. “예기치 않은 사내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를 원하시나요?” 그분들은 “물론이죠!”라고 대답했습니다. 나중에 저의 생모가 저를 입양하게 된 양부모 중에 양어머니는 고등학교만 졸업하신 분이고, 양아버지는 고등학교조차 졸업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최종 입양동의서에 서명을 거절했습니다. 결국 몇 달 후 양부모가 저를 꼭 대학에 보내겠다고 약속을 했을 때 비로소 그녀의 마음이 누그러지게 되었습니다.

 

 And 17 years later I did go to college. But I naively chose a college that was almost as expensive as Stanford, and all of my working-class parents' savings were being spent on my college tuition. After six months, I couldn't see the value in it. I had no idea what I wanted to do with my life and no idea how college was going to help me figure it out. And here I was spending all of the money my parents had saved their entire life. So I decided to drop out and trust that it would all work out OK. It was pretty scary at the time, but looking back it was one of the best decisions I ever made. The minute I dropped out I could stop taking the required classes that didn't interest me, and begin dropping in on the ones that looked interesting.
 

 그리고 17년 후 저는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저는 순진하게도 스탠포드 대학 못지않게 등록금이 비싼 학교를 선택했고, 노동자 계층이셨던 양부모는 저의 학비로 그간 저축해 오셨던 돈들을 써야만 했습니다. 6개월 후에 저는 이런 상황에서 의미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아무런 생각도 없었고, 또한 대학이 이런 저를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지 의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양부모께서 평생 모은 돈을 펑펑 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저는 자퇴를 결심했고, 결과적으로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는 솔직히 상당히 두려웠습니다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제가 내린 결정 중에 최고의 결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런 결정을 내리자마자 흥미 없었던 과목은 중단하고 흥미로운 과목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It wasn't all romantic. I didn't have a dorm room, so I slept on the floor in friends' rooms, I returned coke bottles for the 5¢ deposits to buy food with, and I would walk the 7 miles across town every Sunday night to get one good meal a week at the Hare Krishna temple. I loved it. And much of what I stumbled into by following my curiosity and intuition turned out to be priceless later on. Let me give you one example:
 

 솔직히 전부 낭만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기숙사를 쓰지 못해서 친구 집의 마룻바닥에서 잠을 잤고, 하나에 5센트 하는 빈 콜라병을 모아서 음식을 사먹고, 매 일요일이면 공짜로 저녁을 주는 하레 크리슈나 사원에 가기 위해 7마일을 걷곤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게 좋았습니다. 저의 호기심과 직관을 따랐던 그때의 경험이 나중에 정말로 값지게 쓰였습니다.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Reed College at that time offered perhaps the best calligraphy instruction in the country. Throughout the campus every poster, every label on every drawer, was beautifully hand calligraphed. Because I had dropped out and didn't have to take the normal classes, I decided to take a calligraphy class to learn how to do this. I learned about serif and san serif typefaces, about varying the amount of space between different letter combinations, about what makes great typography great. It was beautiful, historical, artistically subtle in a way that science can't capture, and I found it fascinating.
 

 그 당시 리드대학에선 아마도 전국에서 가장 뛰어난 서법강의를 제공했습니다. 캠퍼스 곳곳에 포스터나 서랍 위의 라벨에 멋지게 손으로 쓴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저는 자퇴생이었기 때문에 전공강의를 들을 필요가 없었으므로, 이것을 창조할 수 있는 서법강의를 청강하기로 하였습니다. 저는 그 강의를 통해 “세리프체”, “산세리프체”에 대하여 배웠고, 다양한 글자체의 조합에 대하여 배웠고 어떻게 하면 뛰어난 서체를 더욱 뛰어나게 하는지를 배웠습니다. 그것은 아름답고 역사적이면서 과학적으로는 잡아낼 수 없는 예술적인 면도 가지고 있었기에 저는 그것에 완전히 반해버렸습니다.

 

 None of this had even a hope of any practical application in my life. But ten years later, when we were designing the first Macintosh computer, it all came back to me. And we designed it all into the Mac. It was the first computer with beautiful typography. If I had never dropped in on that single course in college, the Mac would have never had multiple typefaces or proportionally spaced fonts. And since Windows just copied the Mac, its likely that no personal computer would have them. If I had never dropped out, I would have never dropped in on this calligraphy class, and personal computers might not have the wonderful typography that they do. Of course it was impossible to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when I was in college. But it was very, very clear looking backwards ten years later.
 

 이 모든 것들이 제 삶에 현실적으로 응용되리라는 희망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10년 후에 우리가 첫 매킨토시를 설계할 때, 그 당시에 배웠던 것들을 적용할 기회가 왔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맥에 모두 담았습니다. 맥은 아름다운 서체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최초의 컴퓨터입니다. 만약 제가 그 당시에 그 강의를 듣지 못했다면 아마도 맥은 다양한 서체시스템이나 비례크기의 폰트들을 가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결국에 윈도우가 맥을 따라 했지만, 그것은 어떤 개인용 컴퓨터에도 없던 것들이었습니다. 그 당시 제가 자퇴를 하지 않았다면 그 서체강의를 듣지 못했을 것이고, 결국 개인용 컴퓨터는 이러한 멋진 서체들을 갖추지 못했을 것입니다. 물론 제가 대학에 있을 때 앞을 내다보고 점들을 이어나가는 것은 불가능하였습니다. 하지만 10년 후에 되돌아보니 그것은 정말로 명료한 선택이었습니다.

 

 Again,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You have to trust in something — your gut, destiny, life, karma, whatever. This approach has never let me down, and i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in my life.
 

 다시 말하면 앞날을 예측한다고 점들을 이어나갈 수는 없습니다. 뒤돌아 볼 때 오직 이어나감이 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언젠가 그 점들이 미래에 연결되리라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직감이든 운명이든 삶이든 인연이든 무엇이라도 믿어야 합니다. 이런 접근이 저를 궁지에 빠뜨린 적이 없었으며, 제 삶의 모든 것을 지금과 같이 변화시켜 왔습니다.

 

†Second Story
 

 My second story is about love and loss.

 저의 두 번째 이야기는 사랑과 상실에 관해서 입니다.

 

 I was lucky — I found what I loved to do early in life. Woz and I started Apple in my parents garage when I was 20. We worked hard, and in 10 years Apple had grown from just the two of us in a garage into a $2 billion company with over 4000 employees. We had just released our finest creation — the Macintosh — a year earlier, and I had just turned 30. And then I got fired. How can you get fired from a company you started? Well, as Apple grew we hired someone who I thought was very talented to run the company with me, and for the first year or so things went well. But then our visions of the future began to diverge and eventually we had a falling out. When we did, our Board of Directors sided with him. So at 30 I was out. And very publicly out. What had been the focus of my entire adult life was gone, and it was devastating.
 

 저는 행운아였습니다. 저는 제가 정말 하고자 하는 일을 빠르게 찾았습니다. 저는 20세 때 워즈와 함께 저의 부모님의 창고에서 애플사를 시작했습니다. 우린 열심히 일했고, 10년 후 애플은 단 2명뿐이었던 차고 회사에서 4000명의 직원을 거느린 20억불 규모의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제가 30세가 되기 1년 전에 우리는 우리의 최고 창작품, 매킨토시를 출시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해고되었습니다. 어떻게 자기가 만든 회사에서 자기가 해고될 수 있었을까요? 글쎄요, 애플이 성장할 때 저는 유능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고용하여 저와 함께 경영을 하도록 하였고, 첫해에는 그럭저럭 순조로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비전은 나뉘기 시작했고 결국 우리는 몰락하기 시작했습니다. 관계가 심각해지자, 우리의 이사진은 그의 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30세의 나이에 저는 애플을 나오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아주 공개적이었습니다. 제 인생을 통틀어 성인이 되면서 몰입하던 목표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순간이었고, 그것은 제게 지독히도 충격적이었습니다.

 

 I really didn't know what to do for a few months. I felt that I had let the previous generation of entrepreneurs down - that I had dropped the baton as it was being passed to me. I met with David Packard and Bob Noyce and tried to apologize for screwing up so badly. I was a very public failure, and I even thought about running away from the valley. But something slowly began to dawn on me — I still loved what I did. The turn of events at Apple had not changed that one bit. I had been rejected, but I was still in love. And so I decided to start over.
 

 저는 몇 달 동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말 알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이전 세대로부터 받아온 기업가정신을 제가 망가뜨린 듯한, 마치 이어달리기 경주에서 제게 전달된 바통을 떨어뜨린 느낌이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데이비드 패커드와 밥 노이스를 만났고 제가 망쳐버린 것들에 대하여 사과하려 했습니다. 저는 매우 공개적인 실패작이었으며, 심지어 실리콘벨리를 떠나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 속에는 무언가가 천천히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여전히 제가 했던 일들을 사랑했었습니다. 애플사에서 겪었던 일들조차도 그런 마음을 흔들지는 못했습니다. 저는 해고당했지만, 여전히 제 일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저는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I didn't see it then, but it turned out that getting fired from Apple was the best thing that could have ever happened to me. The heaviness of being successful was replaced by the lightness of being a beginner again, less sure about everything. It freed me to enter one of the most creative periods of my life.
 

 그때는 몰랐지만 애플에서 해고당한 일이 제 삶에서 가장 최고의 경험이었음을 나중에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공에 대한 중압감이 다시금 새로 시작하는 초보자의 가벼움으로 바뀌었으며, 모든 것에 함부로 단정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저를 제 삶에서 가장 창조적인 시기로 진입할 수 있도록 자유롭게 해주었습니다.

 

 During the next five years, I started a company named NeXT, another company named Pixar, and fell in love with an amazing woman who would become my wife. Pixar went on to create the worlds first computer animated feature film, Toy Story, and is now the most successful animation studio in the world. In a remarkable turn of events, Apple bought NeXT, I returned to Apple, and the technology we developed at NeXT is at the heart of Apple's current renaissance. And Laurene and I have a wonderful family together.
 

 다음 5년 동안 저는 넥스트를 창업했고, 곧이어 픽사도 창업했으며, 제 아내가 될 놀라운 여성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픽사는 세계 최초의 컴퓨터 애니메이션 영화인 토이스토리를 제작했으며, 지금은 세계에서 최고로 성공한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입니다. 여러 주목할 만한 일들이 진행되는 와중에 애플은 넥스트를 사들였고, 저는 다시 애플로 돌아오게 되었으며, 우리가 넥스트에서 개발한 기술은 현재 애플의 다재다능한 핵심 기술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로렌과 저는 멋진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I'm pretty sure none of this would have happened if I hadn't been fired from Apple. It was awful tasting medicine, but I guess the patient needed it. Sometimes life hits you in the head with a brick. Don't lose faith. I'm convinced that the only thing that kept me going was that I loved what I did.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And that is as true for your work as it is for your lovers. Your work is going to fill a large part of your life, and the only way to be truly satisfied is to do what you believe is great work. And the only way to do great work is to love what you do. If you haven't found it yet, keep looking. Don't settle. As with all matters of the heart, you'll know when you find it. And, like any great relationship, it just gets better and better as the years roll on. So keep looking until you find it. Don't settle.

 
 저는 확신하건데 제가 애플에서 해고되지 않았다면 이런 일들은 저에게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마치 지독히도 쓴 맛의 약과 같으나 분명 환자를 낳게 해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때로는 삶이 여러분의 머리를 벽돌로 내리치기도 합니다. 그때 믿음을 저버리지 마세요. 제가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제가 하는 일에 대한 사랑이었다고 확신합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이 사랑하는 대상을 찾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야 하듯 여러분의 일도 마찬가지 입니다. 여러분의 일들은 앞으로 여러분의 인생에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될 것이며, 여러분이 진실로 만족하는 방법은 여러분이 대단한 의미가 있다고 믿는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대단한 의미가 있는 일을 하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여러분이 하는 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만약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면 계속 찾아보세요. 쉽게 결정하지 마세요. 온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일들처럼 여러분이 그런 일을 발견할 때 여러분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치 좋은 친구사이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좋아질 것입니다. 그러니 발견할 때까지 계속 찾아보세요. 다시 말하지만, 쉽게 결정하지 마세요.

 

†Third Story
 

 My third story is about death.

 저의 세 번째 이야기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When I was 17, I read a quote that went something like: "If you live each day as if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It made an impression on me, and since then, for the past 33 years, I have looked in the mirror every morning and asked myself: "If today were the last day of my life, would I want to do what I am about to do today?" And whenever the answer has been "No" for too many days in a row, I know I need to change something.

 
 제가 17살 때 다음과 같은 문장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만일 네가 매일을 너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산다면 언젠가 너는 옳은 길을 가게 될 것이다” 그때부터 지난 33년간 이 문구는 저의 마음속에 각인되었습니다. 저는 매일 아침 일어나 거울을 보며 제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봅니다. “만일 오늘이 나의 인생에 마지막 날이라면 내가 오늘 하려는 일을 정말 할까?” 그러면 대부분의 날들의 대답은 “아니오”였고, 그럴 때마다 저는 무언가 변화될 필요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Remembering that I'll be dead soon is the most important tool I've ever encountered to help me make the big choices in life. Because almost everything — all external expectations, all pride, all fear of embarrassment or failure - these things just fall away in the face of death, leaving only what is truly important. Remembering that you are going to die is the best way I know to avoid the trap of thinking you have something to lose. You are already naked. There is no reason not to follow your heart.


 제가 곧 죽을 거라는 사실을 다시금 기억하는 일이 저에게는 큰 결단을 내리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도구입니다. 왜냐하면 거의 대부분의 일에서 외부의 기대나 자존심, 당혹감이나 실패에 대한 두려움들 ― 이러한 것들은 죽음이라는 사실 앞에서는 모두 사라져 버리고 진정으로 중요한 것들만을 남겨놓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곧 죽게 될 거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당신이 무엇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생각의 함정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이미 당신은 알몸입니다. 마음이 가고자 하는 곳을 따라가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About a year ago I was diagnosed with cancer. I had a scan at 7:30 in the morning, and it clearly showed a tumor on my pancreas. I didn't even know what a pancreas was. The doctors told me this was almost certainly a type of cancer that is incurable, and that I should expect to live no longer than three to six months. My doctor advised me to go home and get my affairs in order, which is doctor's code for prepare to die. It means to try to tell your kids everything you thought you'd have the next 10 years to tell them in just a few months. It means to make sure everything is buttoned up so that it will be as easy as possible for your family. It means to say your goodbyes.


 약 1년 전에 저는 암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아침 7시 반에 스캔을 받았었고 판독사진은 선명하게 저의 췌장에서 종양을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췌장이 뭔지도 몰랐었습니다. 의사가 말하기를 거의 치료가 불가능한 종류의 암이라고 하였으며 제가 길어야 3개월에서 6개월 정도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의사가 저에게 집으로 돌아가서 벌려 놓은 일들을 정리하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말하자면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는 의사들의 표현이었습니다. 그 의미는 돌아가 아이들에게 십년 간 해줄 이야기들을 몇 달 만에 다 끝내라는 뜻이었으며 모든 것을 잘 정리해서 가족들이 편하게 죽음을 맞이하게끔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작별인사를 하라는 말이었습니다.

 

 I lived with that diagnosis all day. Later that evening I had a biopsy, where they stuck an endoscope down my throat, through my stomach and into my intestines, put a needle into my pancreas and got a few cells from the tumor. I was sedated, but my wife, who was there, told me that when they viewed the cells under a microscope the doctors started crying because it turned out to be a very rare form of pancreatic cancer that is curable with surgery. I had the surgery and I'm fine now.


 저는 그날 하루 내내 진단에 대해 생각하며 보냈습니다. 그날 밤에 생체검사를 했는데 의사들이 가는 관을 저의 식도로 집어넣어 위를 지나 창자 속까지 들어갔으며 저의 췌장에 바늘을 삽입하여 종양으로부터 조직을 일부 채취 하였습니다. 저는 마취상태였으나 그 당시 함께 있던 저의 처는 의사들이 현미경을 통해 그 조직을 관찰하더니 그 조직이 외과적인 수술로 치료가 가능한 희귀한 형태의 췌장암임을 발견하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저는 수술을 받았고 완치되었습니다.

 

 This was the closest I've been to facing death, and I hope its the closest I get for a few more decades. Having lived through it, I can now say this to you with a bit more certainty than when death was a useful but purely intellectual concept:


 이것이 제가 가장 가까이 죽음과 직면했던 경험이며, 앞으로도 몇 십년간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 일속에서 살아나고 나서 저는 좀 더 확실하게 여러분에게 말씀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No one wants to die. Even people who want to go to heaven don't want to die to get there. And yet death is the destination we all share. No one has ever escaped it. And that is as it should be, because 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 It is Life's change agent. It clears out the old to make way for the new. Right now the new is you, but someday not too long from now, you will gradually become the old and be cleared away. Sorry to be so dramatic, but it is quite true.

 
 어느 누구도 죽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심지어 천국에 가고자 하는 사람들조차도 죽어서 가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역시 죽음은 우리 모두가 감당해야만 하는 종착지입니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곳이죠. 그리고 오직 죽음을 통해서만 새로운 삶이 창조되기 때문에 그래야만 합니다. 죽음은 인생을 변화시키는 대리인 입니다. 낡고 오래된 것을 새것으로 깨끗하게 바꾸어 줍니다. 지금 당장 여러분들은 가장 새로운 존재이지만 언젠가 머지않아 여러분들도 늙어갈 것이며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너무 극적으로 얘기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명백히 사실입니다.

 

 Your time is l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someone else's life. Don't be trapped by dogma — which is living with the results of other people's thinking. Don't let the noise of others' opinions drown out your own inner voice. And most important,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They somehow already know what you truly want to become. Everything else is secondary.


 여러분들의 인생은 제한되어 있으니 다른 사람의 것인 양 인생을 허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독단에 사로잡히지 마세요. 그렇게 산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결과에만 의존하며 사는 것과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주장과 소리에 묻혀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못 들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용기를 가지고 자신의 마음과 직관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이미 여러분들이 진정 무엇이 되고자 하는지 이미 알고 있을 겁니다. 나머지는 모두 이차적인 것입니다.

 

 When I was young, there was an amazing publication called The Whole Earth Catalog, which was one of the bibles of my generation. It was created by a fellow named Stewart Brand not far from here in Menlo Park, and he brought it to life with his poetic touch. This was in the late 1960's, before personal computers and desktop publishing, so it was all made with typewriters, scissors, and polaroid cameras. It was sort of like Google in paperback form, 35 years before Google came along: it was idealistic, and overflowing with neat tools and great notions.

 
 제가 어렸을 때 “The Whole Earth Catalog”이라는 대단한 책이 있었습니다. 저의 세대에서는 거의 바이블과도 같은 책이었습니다. 여기서 멀지 않은 멘로 파크란 곳에 사는 “스튜어트 브랜드” 라는 작가가 쓴 책인데 자신의 시적인 영감을 담은 책입니다. 1960년대에 써진 책인데 그 당시에는 개인용 컴퓨터라던가 탁상출판의 개념조차 없었기 때문에, 그 책은 타자기와 가위와 즉석카메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 책은 마치 구글의 종이책처럼 35년 전의 구글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상적이며 깔끔한 문체와 위대한 개념들로 가득한 책입니다.

 

 Stewart and his team put out several issues of The Whole Earth Catalog, and then when it had run its course, they put out a final issue. It was the mid-1970s, and I was your age. On the back cover of their final issue was a photograph of an early morning country road, the kind you might find yourself hitchhiking on if you were so adventurous. Beneath it were the words: "Stay Hungry. Stay Foolish." It was their farewell message as they signed off. Stay Hungry. Stay Foolish. And I have always wished that for myself. And now, as you graduate to begin anew, I wish that for you.


 스튜어트와 그의 팀은 “The Whole Earth Catalog” 를 이후에도 몇 차례 더 발간하였고 그런 시기를 지나 1970년대에 최종판을 발간했습니다. 그때가 제가 지금의 여러분들과 같은 나이였을 때입니다. 최종판의 뒷장에는 이른 아침 시골길 사진이었는데, 모험심이 가득한 사람이 마치 히치하이크를 한번쯤 해볼 만한 거리였습니다. 그 사진 아래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습니다. “배고픈 채로 지내라, 바보로 남아라.” 이것이 최종판을 발행하던 그들의 작별 메시지입니다. 배고픈 채로 지내라, 바보처럼 지내라. 저는 항상 제 자신이 그러기를 바래왔습니다. 그리고 지금 졸업을 하고 새로운 시작을 하는 여러분들도 그러기를 기원합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배고픈 채로 지내라, 바보로 남아라.

 

 Thank you all very much.
 

 여러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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